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낭 포슈 (문단 편집) === 군인 복무 === 1885년, 포슈는 육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해서 반 4등으로 졸업했다. 인생의 전환기라 평가될 정도로 포슈는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를 통해 많은 동급생들과 강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, [[클라우제비츠]]의 [[군사학]], 독일의 사회 등을 공부하면서 미래의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해 왔다. 준수한 성적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한 포슈는 꽤 안정적인 출세 가도를 펼쳤다. 1887년에는 육군대학의 보조 교수로 돌아와서 자신이 형성한 공세지향주의와 '의지'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군사 이론을 가르쳤다.[* 본문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, 이걸 정신승리론으로 볼 여지가 없다. 포슈의 군사 이론 자체가 나폴레옹 전쟁과 보불전쟁을 바탕으로 한 [[1차 대전]]이 터지기 10년 전에 출간된 것을 감안하면 1차 대전의 급격한 전황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.] || [[파일:attachment/페르디낭 포슈/foch_of_age.jpg|width=300]] || || 포슈의 젊은 시절. [br]제35포병연대의 지휘관이었다. || 다만 19세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독실한 신앙심과 예수회에 형제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. 1901년때는 [[대령]]으로의 진급이 늦춰지고 육군대학에서도 해임되고, 좌천직으로 별볼일 없는 라온과 반의 군부대에서 복무하는 고초를 겪었다.[* 이때 솜 강과 [[벨기에]] 국경 지역인 엔에서도 복무했는데,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 지역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데 이때의 경험이 꽤 유리하게 작용되었다.]포슈는 개의치 않고 충실히 군복무를 이어가며 그의 대표 군사 사상 저작 (전쟁의 원칙)과 (전쟁지휘론)을 출간했다. 그러던 와중, 1907년에 들어서 [[준장]]으로 진급되고 의외로 반교권주의로 유명한 당시 수상 [[조르주 클레망소]](Georges Clemenceau)와 직접 대면해서 육군대학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. 의아한 포슈는 형제 중 한 명이 예수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강조했지만 포슈의 능력을 신뢰한 클레망소는 반대로 그의 신앙심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여전히 육군대학의 감독으로 삼았다. 이때 대면한 무명의 군사상가와 평화기의 총리는 10년 후 국가의 위기 속에 참모총장과 전시 수상으로 다시 대면해 군민 관계의 모범 사례로 남을 정도로 환상적인 협동을 보여준다. 1907에서 1911년까지 육군대학 감독[* 간혹 교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.]으로 활동하는데, 이때 포슈는 그동안 자신이 형성한 군사 이론을 마음껏 가르친다. 다만 이 경력 때문에 리델 하트나 콘월 등 영국 쪽 학자들에게 무분별적인 공세주의(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"[[엘랑 비탈]]" 교리)를 가르친 것으로 욕 먹지만 일전에 출간한 <전쟁의 원칙>이나 <전쟁운영론>을 보면 포슈가 공세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훗날 포슈의 제자였던 루이 그랑메종이 창안하는 공세유일주의와 궤를 달리한다.[* 포슈의 수제자였던 그랑메종은 1차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1년 만인 1915년에 전사했다. 사실 그랑메종도 전전 그의 군사사상이 진짜 무분별한 공세주의라고 비판받는 것에 반해 1차대전 당시 실전 부대지휘에서는 나름 성과를 낸 편이었다.] 애초에 당대의 시점에서 "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"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 수준의 개념이었고, 발달된 화력 때문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수반될 것이라는 점은 1차 대전식 참호전의 전조로 칭해지는 [[러일전쟁]]이 일어난 뒤조차도 누구도 상정하지 않던 일이었다. 러일전쟁의 전훈을 비교적 잘 반영했던 독일군조차도 러일전쟁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'''극동에서의 특수한 상황이다'''라고 평가한 게 당대의 현실이었다. || [[파일:v8filfx.jpg|width=400]] || || 포슈(左)와 윌슨(右).|| 훗날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, 포슈는 이로써 프랑스의 대표 군사사상가로 이름을 날린다. 이때 영국의 캠벌리 참모 대학의 협력과정에서 캠벌리 대학의 친프랑스파 교장 헨리 윌슨[* 프랑스인 유모의 영향으로 윌슨은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, 프랑스를 동경하게 되었다고한다. [[리델 하트]]는 윌슨이 --하필이면-- 친프랑스파라서 포슈가 영국군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여지를 만들어 놨다고 통탄한 것은 덤.]과 친해지게 된다. 훗날 1차 대전 때 이 우정은 윌슨이 영국 원정군의 계획을 포슈에게 귀띔해 주는 등 두 군대의 협동에 있어서 꽤 중요하게 적용된다. 참고로 윌슨은 포슈의 막내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적도 있다! [* 물론 그린할 교수는 이걸 너무 확대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의했지만 어쨌거나 딸의 결혼식에도 부를 정도면 꽤 친밀한 사이임은 부정할 수 없다. 다만 1차 대전 말기에 가면 포슈-윌슨 사이도 좀 멀어진다(...).] 이 시절 [[러시아 제국]]군의 기동 연습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러시아군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, 그로 인해 윌슨과의 영불 협동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. 1911년 이후로는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진급해서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1913년부터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낭시(Nancy)에서 노엘 드 카스텔노 장군이 담당하는 제2군(Second Army)휘하의 [[제17계획]]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을 일명 "강철 군단"[* 가끔 오해되는 게, 강철 군단이라는 별명은 [[1차 대전]] 당시 특별히 뛰어난 전과를 내서 얻은 별명이 아니다. 아마 사기 증진용으로 1914년 이전부터 쓰였다.] 제20군단(XX Corps)을 지휘한다. || [[파일:attachment/페르디낭 포슈/foch_and_joffre.jpg]] || || 좋은 친구 포슈와 조프르. || 이때만 해도 50대가 넘었던 [[노장]] 포슈를 바로 은퇴시키지 않고 꾸준히 기용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[[조제프 조프르]] 장군의 지지가 한몫을 했다. 같은 지역 출신인 데다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시절부터 포슈를 알던 조프르는 포슈의 능력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다. 아예 [[부사령관]]으로 두려고 했었지만 포슈의 신앙심을 꺼렸던 당시 프랑스의 [[국방장관]] 아돌프 메시미의 반대에 의해서 카스텔노를 대신 기용하게 된다 --그런데 이 양반도 상당한 신앙심을 자랑한 것은 함정--.[* 별명부터 '''"싸우는 수사(Fighting Friar)"'''인 데다가 종교에 있어서 오히려 포슈의 비판을 산 적도 있다.] 이에 모리스 가믈랭[* [[제2차 세계대전]]의 [[프랑스 침공]] 때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엄청난 삽질을 연거푸 벌이다가 [[막심 베이강]]으로 교체된 그 가믈랭이다. ] [[대령]]을 보내서 포슈에게 왜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게 했는데 포슈는 가믈랭의 설명은 모두 일축하고 대신 '''[[슐리펜 계획]]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해서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35개의 독일군단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했다.'''[* 당시 포슈는 윌슨과의 후대 영불 협동에 대한 논의에서 독일군의 [[벨기에 침공]]은 기정사실로 두고 있었다. 다만 이 침공이 전면전일지 아니면 기만전일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. 재미있는 점은 터크만 여사에 의하면 포슈가 삽질이나 마찬가지인 [[제17계획]]의 시초를 만들어놨다고 설명했지만 포슈 본인은 [[제17계획]]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. 수적 우위를 유지하며 진공해 나가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던 포슈는 거의 동수의 프랑스 침공군으로 독일군을 물리쳐서 [[알자스-로렌]]탈환을 시도하는 것은 삽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